울산시교육청-한국산업인력공단 MOU 체결,

연간 상설 진로직업체험프로그램 제공



  

울산광역시교육청과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지난 6월 16일 오전 10시 한국산업인력공단 7층 청렴홀에서 연간 상설 진로직업체험

프로그램 제공과 고졸취업 지속 확대 전문 기능인 양성 협조를 위해 MOU를 체결하고, 기관 간의 교육관련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는 소식입니다.



                                  △ 울산시 교육청과 한국산업인력공단 업무협약식 ⓒ한국산업인력공단




한국산업인력공단 글로벌숙련기술진흥원은 특성화고·마이스터고의 기능인력 양성에 적극 협력해 왔으며, 올해 10월 울산에서 

개최되는 ‘제50회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도 울산시가 좋은 성적이 나타날 수 있도록 협조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 울산시 교육청과 한국산업인력공단 업무협약식 ⓒ한국산업인력공단




시교육청 관계자는 “이번 MOU 체결을 통해 울산시교육청과 한국산업인력공단이 함께 다양한 진로직업체험활동 확대와 직업능력

개발 및 직업교육, 고졸취업지원, 숙련기술인 우대풍토 조성 및 숙련기술분야 진학 프로젝트 발굴 등을 펼칠 계획이다”라고 전했습니다.






△ 울산시 교육청과 한국산업인력공단 업무협약식 ⓒ한국산업인력공단

 



 이상 '아프로는 지금' 이었습니다!^^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한국산업인력공단





오늘의 아프로 피플!


비파괴 검사 기술 혁신으로 안전 사회를 구현하는 세명검사기술(주) 제정근 대표를 만나보겠습니다!




비파괴 검사에 빠진 청년, 주독야경을 실천하다


  


  1977년 2월 진주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제정근 대표는 부산제철(현 한국철강) 입사, 컨테이너 제작 부문에서 검사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제품이 정확한 크기로 만들어졌는지 줄자로 확인하는 단순 수치 검사였는데요. 1983년 군복무를 마친 그는

다시 일자리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처음 접하게 된 비파괴 검사의 장래성과 매력에 푹빠져 한국검사개발(주)에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비파괴검사는 매우 생소한 분야였습니다. 원자력 관련 구조물 공사에서나 사용되는 기술이었죠. 

 하지만 저는 산업이 발전할 수록 대형공사가 늘어나면서, 동시에 비파괴검사 수요도 늘어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편하고 익숙한 일반 검사 구직을 과감히 포기하고, 생소한 비파괴검사 분야에 뛰어든 그의 판단은 분명 옳았습니다. 

1994년 성수대교 사고에 이어 일 년 뒤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까지 겹치며, 국민 안전과 직결된 비파괴검사/수요가 확연히 

증가하기 시작한 것인데요. 


 비파괴검사 업무는 힘들었습니다. 관련 법령이 강화되어 작업장마다 방사선투괴검사실 RT-Room이 설치된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현장 직원들이 퇴근한 뒤 야간이나 휴일에 검사가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제 대표는 고졸 

기술직에 대한 차별을 극복하고 실력을 더욱 키우기 위해 창원기능대학 금속학과 진학을 결심했습니다.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하면서도 1984년 비파괴검사 기능사 2급 자격 취득에 이어, 창원기능대학 입학지원 요건인 1급 기능사 자격까지 취득(1986년), 1988년 마침내 '주독야경'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 세명검사기술(주) 제정근 대표 ⓒ한국산업인력공단




 

비파괴검사 전문기업 세명검사기술(주), 안전은 타협 대상이 아니다





 대학을 졸업한 제 대표는 비파괴검사 회사를 차렸지만 많은 우여곡적을 겪어야만 했고, 여러 회사를 전전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비파괴검사 전문기업을 키워 이 분야 최고가 돼 보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1997년 말 나진검사기술에 들어가,

창원권역의 비파괴검사 업무를 도맡아 했습니다. 이후 1999년 말 회사가 부도 위기를 맞자 장비와 인력을 인수, 이듬해 3월에

지금이 세명검사기술(주)을 창업했습니다. 최고가 되기 위한 발판이 비로소 만들어진 것이죠.


 현장에서 15년 이상 쌓아온 경험은 회사를 운영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됐는데요. 창업 당시 직원 20명으로 17억원의

매출을 기록한 제 대표는 10년 뒤인 2010년 매출을 105억 3,100만원 규모로 끌어 올렸습니다.


 현장 경험과 함께 그가 꼽는 성공 비결은 정도 경영, 국민의 안전과 직결된 일인 만큼 검사 결과를 놓고 타협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검사 결과가 불량으로 나올 경우 이를 수정하는 데 비용과 시간이 추가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몇몇 제조 업체들은 압력을 넣기도 했지만 제 대표는 언제나 정직하게 검사했습니다. 안전과 관련해서 타협은 없다는 원칙은 업체들과의 

거래 단절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위기일 수록 정공법을 사용한 것에 대해 결국은 보답을 받았습니다. 철도차량생산 기업인 

현대 로템과 노르웨이의 해양플랜트 업체 NOV 등 더 큰 규모의 업체들과 거래를 맺기 시작한 것. 이 덕분에 지난해 매출

(173억 5,800만원)은 다시 상승가도에 올랐고, 올해 200억원을 넘보고 있습니다.




기본중의 기본, 안전에 충실하여 사람을 지키다





 제 대표는 직원들에 대한 투자 역시 아끼지 않았습니다. 


 해외 발주 제품에 대해 원활한 업무가 기능하려면 ISO(유럽), ASNT(미국) 및 비파괴검사기사(국내) 등 세가지 자격을 갖춰야

하는데 모든 비용을 회사에서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이 같은 노력 덕분일까, 유럽과 미국의 비파괴검사 자격 기준을 충족하고있는 직원은 현재 전체 270명 중 200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한편, 지난 2007년 부설연구소를 설립, 비파괴검사 장비의 국산화 및 자동화 기술 개발에도 힘을 쏟고 있는데요. 이 노력의

결과로 같은 해 강판 제조업체인 EEW코리아 생산공장의 방사선투과 검사 장비를 자동화 했고, 비파괴검사업무의 효율을 10배이상 향상시켰습니다. 이 공을 인정 받아 기술 혁신형 중소기업(Inno-Biz)으로 지정됨은 물론, 6건의 관련 특허를 취득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제 대표는 비파괴검사를 통해 안전한 사회 구현에도 이바지하고 있는데요. 2010년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에서

조직한 방사선사고지원단(U-REST)에 가입. 국민들을 방사선 오염으로부터 보호하고자 경남권역 방사선원사고 지원단장으로도 활약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경쟁이 치열하고 그 경쟁이 결국은 비용 절감 전쟁으로 이어지면서, 많은 업체들이 전수검사를 부분검사로 전환하는 등의 방법으로 안전의 최후 보루라고 할 수 있는 비파괴검사 비용을 줄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 수록 기본 중의 기본, 안전에 충실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아프로 피플이었습니다^^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한국산업인력공단




 

디지털 시대의 기술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머릿속으로만 상상해오던 많은 것들을 우리 눈앞에 실재하는 현실로 구현해주었는데요! 엠게임이엔티는 세상의 모든 재미게임이라는 키워드로 다양하게 풀어냄으로써 상상을 현실로 만들고, 그것을 가능하도록 하는 창의적 인재를 키우는 기업입니다.

상상보다 더 즐겁고 놀라운 하루하루로 더 멋진 현실을 만들어가는 기업, 엠게임이엔티를 만나보겠습니다!

    

 

무한한 가능성, 일학습병행제로 발견하다



   

 엠게임이엔티의 사무실로 들어서자 책장 가득 꽂힌 책들과 곳곳에 세워진 캐릭터 인형, 그리고 피규어들이 이곳에서 하는 일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해줬습니다.


 2003년 서울에서 설립된 엠게임이엔티는 자회사인 엠게임의 고객 만족센터를 비롯한 게임 콘텐츠 운영 서비스전반을 담당하는 기업으로 처음 출발해서 현재, 많은 사람들이 삶을 풍요롭게 즐길 수 있는 디지털 콘텐츠를 제작하는 문화 콘텐츠 전문 기업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엠게임이엔티 학습근로자와 현장 교수들 ⓒ한국산업인력공단



  엠게임이엔티가 일학습병행제와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2014년이었습니다. 엠게임이엔티의 현장교수이기도 한 조익점 이사는 “일학습병행제를 도입하기 이전에는 당장 업무에 투입될 수 있는 관련분야 경력자를 우선적으로 채용했지만, 그러나 기업을 운영해 나가면서 점차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패기 넘치는 도전 정신으로 새로운 기술과 콘텐츠를 개발할 수 있는 젊고 유능한 인재가 필요했다”고 말하며 일학습병행제를 도입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현재 엠게임이엔티에서 근무하고 있는 학습근로자는 모두 15명으로, 게임 기획 단계에 해당하는 시나리오 구상 및 개발, 개발 단계에 해당하는 그래픽 디자인, 그리고 운영 서비스에 해당하는 고객관리 등 회사 내 다양한 직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현장훈련으로 이뤄진 게임 기획과 운영 서비스 전반에 대한 교육훈련을 통해 디지털 콘텐츠 전문가로 한 단계씩 성장해나가고 있습니다.


  엠게임이엔티는 일학습병행제를 도입하기에 앞서 전문가와 함께 기존 산업계의 동향을 파악하고, 이미 개발된 게임 기획 및 운영 서비스 분야의 국가직무능력표준을 적극 활용해 엠게임이엔티에 꼭 맞는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했습니다. 이처럼 일학습병행제는 기업이 스스로 교육훈련을 결정하고 기업에 근무하는 현장교수들이 직접 학습근로자를 가르치기 때문에 꼭 맞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다른 이점으로는 기업이 부담해야 하는 교육비용을 대폭 낮춰준다는 점이 있습니다.


엠게임이엔티에서 운영하는 게임 귀혼한국산업인력공단

 

 

  그렇다면 학습근로자가 생각하는 일학습병행제의 이점은 무엇일까요?


  엠게임이엔티에서 운영 서비스를 담당하는 학습근로자 김혜빈 사원은 일학습병행제를 통해 일과 공부를 동시에 할 수 있고, 무엇보다 이론교육과 실무교육을 병행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일학습병행제의 장점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럼 엠게임이엔티에서 추구하는 인재는 어떤 모습일까요?


  이에 조익정 이사는 저희가 추구하는 목표는 독립 가능한 인재를 육성하는 일입니다. 기획, 개발, 운영 등 디지털 콘텐츠 

업무 전반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스스로 무언가를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사업을 이끌어갈 수 있는 독립적인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엠게임이엔티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갖고 창업을 원하는 근로자에게 사무실과 자본금을 지원하고 일정한 이익률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사내 벤처제도를 운영해 사업을 확장하는 한편, 근로자들에게 새로운 꿈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또한 야근이 잦고 이직률이 높은 산업의 특성상 탄력근무제도를 통해 근로자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업무 효율성을 높이는 등 근무환경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흔히 게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라고들 이야기 합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인재를 우선 선발하고 교육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기업에 꼭 맞는 인재로 성장시키는 것 또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엠게임이엔티와 함께 꿈꾸고 성장할 인재들이 앞으로 만들어갈 세상은 분명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아름답고 따뜻한 

현실일거라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한국산업인력공단









대한민국 현대문학사를 이끄는 양대 산맥_ 문학과 지성사vs창비










 

남북분단의 비극과 독재정권의 횡포라는 검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대한민국의 현대사그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당대의 지성인들이 선택한 방법은 다른 아닌 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 출판계의 두 거목, '문학과 지성사'와 '창비'가 태어났는데요.

 

이번 아프로 라이프에서는 서로의 자극제로 수십 년째 어깨를 나란히 해 오고 있는 이들의 스토리를 전합니다










문학과 지성사




 △순수문학에의 추구의 대표, 문학과 지성사 ⓒ한국산업인력공단




1970, 문학평론가 김현은 문학적 색깔과 뜻을 함께 공유하던 김치수, 김병익, 김주연 등 이른바 문단의 4K로 명명되는 이들과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문학과 인문적 지성의 결합을 중시한 계간지 '문학과 지성'의 발행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5년 후, 이들은 서로에게 걷어 들인 자본금으로 출판사 <문학과 지성사(이하 문지)>를 설립하게 됩니다.

 



문지는 일반적인 출판사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출판사 설립에 동참했던 이들이 출판사업, 계간지, 단행본 출판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에 함께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서로의 다양한 관점을 논의하며 그 결과에 대해서는 공동으로 책임을 지는 시스템을 통해 문지는 굵직한 출판사로서의 발판을 마련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오로지 문학 그 자체에 주력하고자 했던 문지는 소외된 소설가와 시인을 발굴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 결과 창사 이듬해인 1976년부터 최인훈의 '광장',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등 베스트셀러들을 발간하기 시작했고, 이후에도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등 문학사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들을 대중에게 소개하여 그 존재감을 한껏 드러냈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문지시인선을 통해 황동규, 황지우, 기형도 등 주옥같은 거장들의 시선이 발간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김없이 위기의 순간은 찾아왔습니다. 1980년 언론기관통폐합 조치가 시행되면서 출판물에 대한 서슬 퍼런 검열과 함께 '문학과 지성'은 폐간 조치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는데요. 이후, 문지는 문학에만 집중하여 무크지 형태의 비 정기간행물을 발행하다가 1988'문학과 사회'라는 변경된 이름으로 대한민국 대표 계간지로서의 두 번째 도약을 시작합니다.

 



2000년대로 들어서며 경영혁신을 꾀한 문지는 그동안 인문학술서와 문학이 주였던 출간 방향에서 탈피해 해외문학, 아동, 청소년 등 출판 영역의 다변화로 방향을 선회했습니다. 또한 문학과 예술, 사회를 아우르는 복합문화공간인 '사이'를 개원, 독자들과의 소통을 위한 블로그 오픈과 함께 웹진 '문지'를 제작하는 등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유연하게 대처하며 대한민국의 살아있는 현대문학사 거장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창비



△참여문학에의 추구의 대표, 창비 ⓒ한국산업인력공단





<창비>의 탄생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 지성인이었던 백낙청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미국 유학생활을 통해 자유의 필연성을 절감했던 그는 1966, 계간지 '창작과 비평'을 발행하며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74, 그는 도서출판 '창작과 비평사'를 설립합니다. 현대 리얼리즘 문학 융성의 역사가 움트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단순한 문학 창작을 넘어 사회비평까지 녹여내고자 했던 창비는 사회통제를 위한 권력의 위협 앞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길을 헤쳐 나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명작으로 손꼽히는 수많은 금서들이 탄생했는데요. 진보학자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현기영의 '순이삼촌',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신동엽의 '신동엽전집'등은 특히 자유를 열망하던 학생과 청년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금서를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압수 수색과 구속이 빈번하던 시대에 이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결국 1977년 군부는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반공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저자는 물론, 발행인이었던 백낙청까지 불구속기소에 입건시켰습니다. 더불어 끊임없이 저항 문학을 생산해내던 창비에게는 19807월자로 '창작과 비평'에 대한 발간을 중지하라는 조치가 떨어졌는데요.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부 정기간행물로까지 변경하며 계간지 발간을 이어나가기 위한 시도를 거듭하던 창비는 결국 1985년 출판사 등록 취소라는 결과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라이벌 관계에 있던 문지와 창비가 함께 힘을 모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즈음 부터였는데요.

 



규제에 대한 수위가 한결 느슨해진 1988, '창작과 비평'을 복간한 창비는 다시 한 번 출판사로서의 여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기존에 추구하던 참여문학이라는 기본 골조는 유지하되, 이번에는 대중을 아우르는 교양서 발간에도 적극적으로 나선 것입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기사' 등을 발간하며 독자들에게 한층 더 친근하게 다가간 창비는 현재 변화한 매체 환경을 적극 활용한 팟 캐스트 방송, 북 콘서트, 북 카페 등을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해 나가고 있습니다. 끊임없는 자기 혁신을 통해 앞으로 창비가 보여줄 한국 문학의 미래가 기대됩니다!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한국산업인력공단







이소룡vs성룡





가장 큰 라이벌이란 외부가 아닌 내부, 즉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합니다. 무술과 연기로 아시아를 석권한 두 마리의 용, 이소룡과 성룡은 바로 이 가장 큰 라이벌을 이겨낸 인물들로 기억될만 합니다. 끝없이 배우고 익혀가는 과정에서 다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독특한 철학과 스타일을 만들어냈기 때문인데요.

 

이소룡과 성룡의 이야기를 함께 만나보실까요?


 




 

이소룡_영원한 전설이 된 남자




△이소룡, 영원한 전설이 된 남자 ⓒ한국산업인력공단




경극 배우인 아버지와 독일계 혼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소룡은 생후 3개월 만에 아버지 품에 안겨 영화에 등장할 정도로 영화와의 인연이 깊었습니다. 6세 이후 본격적으로 영화에 출연하며 바쁜 아역배우 시절을 보낸 그는 이 때 자신이 주연한 영화의 원작자로부터 부르스 리라는 영어 이름 대신 이소룡이라는 이름을 선사받습니다. 훗날 이 이름이 전 세계를 풍미하게 될 줄은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무술 수련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대가로부터 무술을 전수 받지만, 한 가지 무술을 깊이 있게 배우기보다는 다양한 무술에 관심을 뒀습니다. 이러한 그의 성격이 특정 무술의 형태나 한계에 매달리지 않고 자신의 신체적 특징이나 스타일에 맞는 무술을 추구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이소룡은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한 후 제자들을 받아 본격적인 무술 지도에 나서게 되는데, 바로 이 무술의 영춘권을 기초로 세계 여러 무술의 정점을 혼용한 '절권도' 이며, 그는 절권도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뛰어난 무술 실력은 금세 할리우드 관계자들의 눈길을 끌게 됩니다. 미국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알린 그는 자신의 고향인 홍콩으로 돌아가 영화를 촬영하게 되고, 이것이 바로 이소룡의 첫 주연 영화 <당산대형>입니다. 이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크게 흥행한 이후, 이소룡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울음소리 같은 기합 소리, 기묘하게 일그러지는 표정 연기, 그리고 쌍절곤 액션을 다음 영화인 <정무문>에서 선보이게 됩니다.


 


"항상 자신답게 행동하라.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스스로 믿으며 성공한 사람의 행동을 모방하려 하지 마라"라는 그의 말처럼, 전후 무후한 그의 무술 연기와 연기방식은 전 세계를 매혹시켰고, 이소룡 신드롬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할리우드와의 최초 합작 영화인 <용쟁호투>의 촬영을 끝낸 1973년의 어느 날, 이소룡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나이 겨우 33세의 일이었습니다.

 



비록 그는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자신을 이겨내고 자신만의 독특한 철학과 예술을 통해 만들어진 영화들과 함께 그는 영원한 전설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성룡_살아있는 영웅이 된 남자





△성룡, 살아있는 영웅이 된 남자 ⓒ한국산업인력공단

 



어린 시절 성룡을 둘러싼 것은 극심한 가난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해외에 일자리를 얻으면서 일곱 살이 되던 해 성룡은 우점원 경극학원에 맡겨져 10년간의 수련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곳은 의식주를 제공하며 곡예, 무술, 연기를 가르치는 곳으로 훈련이 아주 혹독하기로 유명했습니다. 경극학원을 졸업한 성룡은 여러 영화의 단역과 스턴트맨, 무술 감독 등을 거쳤는데, 이소룡의 영화인 <정무문>, <용쟁호투>에 스턴트맨으로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스턴트맨으로서의 입지는 확고했지만 스스로 배우로서 성공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성룡은 배우 일을 접고 부모님이 살고 있는 호주로 훌쩍 떠납니다. 그런데 절대적인 인기를 누리던 이소룡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후, 성룡은 이소룡을 대체할만한 배우로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의 예명인 성룡 또한 이소룡을 뛰어넘는 용이 되라는 뜻으로 나유 감독이 지어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소룡의 스타일을 표절한 천편일률적인 영화들이 넘쳐나면서 관객들은 액션 영화를 외면하고 있었고, 성룡 역시 이소룡의 스타일을 강요받으며 자신이 가진 재능을 전부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이때 성룡은 액션과 코미디를 접목시키면 또 다른 흥미를 유발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자신이 존경하던 코미디 배우 '버스터 키튼'과 뮤지컬 배우 '프레드 아스테어'의 연기를 영화에 도입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1978년 무술감독 출신의 연출가 원화펑과 뜻을 같이하여 만든 코미디풍 무협 <사형도수>, <취권> 연작이 붐을 일으키며 일약 스타덤에 올라서게 됩니다, 



이후 성룡은 <프로젝트 A>, <쾌찬차>, <용형호제>로 이어지는 일련의 히트작을 내놓으면서 기존의 홍콩 영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성룡은 무술 가이자 영화배우, 각본가, 감독, 제작자, 가수라는 다양한 타이틀을 거머쥐었습니다.

 



이소룡이라는 거대한 그림자 아래에서도 자신을 이겨내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며 결국 홍콩 최고의 배우가 된 성룡은 지금도 살아있는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한국산업인력공단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