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역사 속에서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은 많이 있었지만, 이름을 남긴 재상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임진왜란 회고록인 <징비록>으로 잘 알려진 유성룡은 그 중 한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올해에는 이를 제목으로 한 드라마가 방영되기도 해 그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기도 했지요. 당시 전란의 지휘와 수습에 많은 공을 세운 그의 삶은 ‘부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유성룡 (1542 ~ 1607) ⓒ나무위키



유성룡은 10년의 정승 생활을 지내면서도 너무나 청렴하고 정직하여 언제나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후대 기록에 남겨져 있습니다. 성호 이익이 그에 대해 쓴 글 <서애청백(西厓淸白)>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회의 옛 집에는 다만 유묵과 집 한 채
자손들 나물과 찌꺼기 밥에 끼니도 어렵네
십년의 정승 자리 어떻게 지냈기에
성도의 뽕나무 800주도 없단 말인가



‘성도의 뽕나무 800주’는 중국의 제갈량이 죽으면서 자신에게 남은 것은 그것과 척박한 땅 15경이라 했던 말에서 따온 것입니다. 겨우 호구지책을 면할 수 있는 이마저도 유성룡에게는 없을 정도였다는 뜻이죠. 그는 재산조차 남기지 않고 간 청백리였습니다.



사실 유성룡은 유복한 집안의 출신입니다. 아버지는 관찰사를 지낸 고관이었고, 형 유운룡도 문과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죠. 명문가로 꼽히는 안동 풍산 유씨 집안에, 10년 정승, 도체찰사까지 지낸 인물이 언제나 가난하고 생활이 어려웠다니, 그의 관직생활이 얼마나 청렴했는지 알만한 대목입니다.




유성룡의 친필 편지 ⓒ위키피디아



그는 퇴계 이황의 수제자로서 이황의 학통을 이었던 큰 학자이기도 했습니다. 탁월한 경륜을 가지고 국란을 이끌었던 지혜의 밑바탕에는 청렴한 정신이 있었던 것이죠. 그리하여 이해관계가 대립했던 당쟁 속에서도 대업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유성룡에게도 탄핵과 파직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벼슬을 버리고 나오자 서울에서는 기식할 집도 없어 알고 지내던 스님을 찾아가 절간에서 숙식을 해결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오죠. 그가 얼마나 깨끗하고 투명한 정치가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가 모든 걸 내려놓고 국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으며, 초가집에서 거처하는 동안 자식들에게 청렴의 중요성을 가르치며 했던 말도 인상적입니다. 



“사람들이 이욕(利慾)에 빠져 염치를 잃어버리는 것은 모두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느 곳이든지 살 수 있다.”



그는 1607년 향년 66세로 눈을 감는데, 유성룡이 세상을 뜨자 선조는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승지를 직접 보내 조문하였습니다. 남대문 상인들은 4일간 장사를 하지 않으며 경세가의 죽음을 애도했고, 백성들은 "유정승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라며 슬퍼했습니다. 서울 옛집이 자리했던 묵사동에는 약 천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하네요. 워낙 청렴했던 탓에 집안에 재산이 없어서 백성들이 제수용품을 차려 장례를 지냈다고 합니다.



국가 개혁을 위해 그가 생각하고 실행했던 일들을 살펴보면 그를 향한 많은 사람들의 애정이 납득이 갑니다. 유성룡은 위로는 퇴계 이황의 사상을 이어받고, 아래로는 조선 후기 실학파를 연결하는 교량적 역할을 하며,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의 재상으로서 그가 가진 경험과 식견을 통해 고통받는 백성들의 삶을 개선시키고자 노력했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유성룡의 갑옷 ⓒ나무위키



그는 왜란 초기, 전란의 책임으로 잠시 파직되었다가 영의정이자 체찰사로 복직합니다. 이때 조선군의 군무를 총괄했으며 조선 후기의 군영으로 유명한 훈련도감을 설치했습니다. 훈련도감은 이후 조선 후기 군제에 큰 영향을 끼쳤죠. 또한 화포를 제조하고 성곽을 수축했으며 새로 설치된 훈련도감의 관리역으로 임명되어 병법서를 강의하는 등 군비 확충에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또한 원군으로 온 명나라 군대를 원만히 상대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습니다.



특히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그에 대비하여 이순신을 정읍 현감에서 전라좌수사로 발탁하고, 권율을 형조정랑에서 국경지대의 요충지인 의주목사로 보낸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인사였습니다. 그의 선견지명이 돋보이는 순간이었죠.



또한 그는 농업 생산성 증대를 위해 새로운 시책을 추진했고, 염업, 수산물 유통 등 물자의 수급조절과 품질향상에 관련된 실용적인 측면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뛰어난 일솜씨와 전란 극복의 공적은 당대 신하들도 인정하는 바였고, 그는 역사상 최악의 전쟁에서 국가의 운명을 실질적으로 책임진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일을 반성하여 앞으로의 일을 경계한다'는 의미에서 전쟁 회고록을 저술한 것만으로도 크게 평가받아야 할 인물이지요.



이렇듯 역사 속 이름을 남긴 큰 인물들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청렴의 정신이 근본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유성룡 역시 그러한 정신으로 대업을 수행한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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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의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다."

오늘의 '청렴' 명언은 바로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신 우리의 위인 '이순신 장군'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의 '청렴'명언 ⓒ한국산업인력공단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이순신 장군은 조선시대의 장수로 임진왜란 등 전투마다 큰 공을 세운 위인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특유의 리더십 뿐만 아니라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의 언행을 살펴보면 청렴 위인 중 1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요. 바로 위에서 보았던 이순신 장군의 명언이 나온 오동나무 사건’ 일화에서 이순신 장군의 청렴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관아의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다



이순신이 전라 좌수영에 속해 있는 발포라는 곳에서 만호라는 벼슬을 하고 있을 때 좌수사 성 박이 심부름 꾼을 보내어 말을 전합니다.

 


심부름꾼 曰  “좌수사 성 박 께서 보내셨습니다.”

 

이순신 장군 “좌수사께서 무슨일로 보냈는가?”

 

심부름꾼 曰 이곳 발포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오라고 하십니다.”

 

이순신 장군 曰 오동나무를? 그래, 무엇에 쓰신다고 하더냐?”

 

심부름꾼 曰 오동나무로 거문고를 만드신다고 합니다. 좌수사께서는 풍류를 즐기시니까요.”

 

이순신 장군은 심부름꾼의 말을 듣고는 생각했다.

'나라가 위급한 시기에 거문고를 만들어 풍류를 즐기다니...' 



이순신 장군 曰 "전함도 아니고 거문고를 만들다니! 오동나무는 나라것이니 함부로 벨 수 없다고 전하라"


심부름꾼은 이순신장군의 말을 듣고 '하찮은 만호 따위가 우두머리에게 대들다니...미쳤군' 이라고 생각하며 돌아가 말을 전했다.


하지만 좌주사 성 박은 '나라의 물건을 사사로이 쓸 수 없다는' 이순신의 말을 전해 듣지만 하나도 틀린 것이 없기에 어찌할 바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오동나무 사건' 일화에서 이순신 장군의 청렴함과 강직함을 엿볼 수 있는데요. 


두 번의 백의종군(흰 옷을 입고 군대에 복무함. 즉 벼슬이 없는 말단군인으로 전쟁터에 나가 참전)과 파직이라는 시련을 감내하고 특유의 굳건한 리더십과 조국애, 강직함, 청렴함으로 '이순신 장군'은 현재까지 많은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위인, 그리고 청렴 위인 중 1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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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청렴' 명언은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 문호임과 동시에 

문명비평가이자 사상가였던 레프 톨스토이가 했던 말입니다.


"욕심이 적으면 적을수록 인생은 행복하다.

이 말은 낡았지만 결코 다 안다고는 할 수 없다."

-레프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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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영웅'이란 말 들어보셨나요? 어지러운 세상에서 큰 공을 세운 영웅을 일컫는 말입니다. 크고 작은 사건들이 많았던 조선 중기에는 이러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답니다. 대표적으로 유성룡, 이항복, 이덕형, 이이 등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위인들이죠. 그런데 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오리 이원익(1547∼1634)은 알고 보면 명신 중에 명신입니다.



얼음처럼 맑고 옥처럼 깨끗한





오리 이원익(1547∼1634) 영정 ⓒ위키피디아

 



오리 이원익은 87세까지 장수했으며, 40여 년간 대신의 지위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관직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변변한 집 한 채가 없을 정도로 청빈한 삶을 살다간 대감이었습니다. 그는 천성적으로 검소하였고 화려하거나 사치스러운 것을 싫어해 여주와 금천의 허술한 초가집에서 지내면서도 편안히 여겼다고 하네요. 실록에 기록된 사관들의 평가는 아래와 같습니다.



"이때에 얼음처럼 맑고 옥처럼 깨끗하여 한 점의 흠이 없는 자는 참으로 많이 얻을 수가 없었지만, 이원익 같은 사람은 성품이 충량하고 적심(赤心)으로 국가를 위해 봉공(奉公)하는 이외에는 털끝만큼도 사적인 것을 영위하지 않았다.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으나 의식(衣食)이 넉넉지 못하여 일생 동안 청빈하였는데, 이는 사람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것인데도 홀로 태연하였다."




뛰어난 능력까지 겸비한 명신





영예와 고난이 교차한 그의 긴 생애를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드라마틱합니다. 그는 임진왜란(45세, 이조판서)과 인조 반정(76세, 영의정), 정묘호란(80세, 영중추부사) 같은 조선 중기의 중요한 사건들을 모두 통과했지요. 나이와 관직이 보여주듯이 그 사건들의 중심에는 오리 이원익이 있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실무적 경륜과 굳은 의지로 그러한 국면을 헤쳐간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광해군, 인조 모두 그를 신임하여 수상으로 임명했던 것을 보면, 그의 위상과 신망이 대단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겠죠.



그럴만도 한 것이, 그는 야욕있는 정치가가 아닌 모범적인 관료였습니다. 당파색에 따라 행동하기 보다는 실무 감각을 갖춘 능력있는 대신이었죠. 때문에 그의 업적은 그가 지방 행정가로 있을 때에 유난히 빛을 발했습니다. 오리 이원익이 황해도 도사로 있을 당시 군적(軍籍)의 착오를 명민하게 시정하여 관찰사 이이의 칭송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조정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학문과 현실 모두에서 깊은 통찰력을 갖고 있던 이이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이원익의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죠.





뽕나무 열매와 누에 ⓒ픽사베이

 


 

또한 이원익은 1587년(선조 20) 황해도 안주목사 시절에 '양잠(뽕을 심어 누에 치는 것)'을 확산시키며 업적을 세웁니다. 이는  지역 경제를 부흥시키는 정책으로, 백성들은 이러한 뽕나무에 ‘이공상(李公桑)’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합니다. '이원익에 의해 계발된 누에와 뽕'이라는 뜻이죠. 이러한 공적으로 그는 형조 참판에 승진됩니다.



임진왜란 시절에는 평안도로 파견되어 관찰사 겸 순찰사로서 평양을 탈환하는데 큰 공을 세웁니다. 한편, 이때 그의 성품까지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이순신 장군을 끝까지 옹호했다는 것입니다.



왜란이 종료되고,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첫 수상으로 이원익을 임명했습니다. 이때에 큰 업적으로는 대동법의 모체가 되는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경기도에 시범 시행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대동법은 전란의 피해를 복구하고 백성의 부담을 줄이려는 목적에서 공납을 쌀로 걷는 제도이죠. 이원익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논의되어온 이 제도의 시행을 강력히 주장해 시행시켰습니다. 앞서 황해도 도사, 안주목사로서 보여준 뛰어난 실무적 관료의 면모가 다시 한번 빛이 났죠.  




고매한 지조와 신념




이원익 친필 간찰 ⓒ위키피디아




하지만 이원익은 광해군 때 임해군 처형을 반대하며 23회나 사직했고, 결국 윤허를 받아내 낙향에 이릅니다. 2년 후 다시 영의정으로 복직하였으나, 이때에도 국왕의 시책에 반대하였고, 인목대비 폐출에도 반대해 여주 지역으로 4년 간 유배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후 인조가 즉위한 뒤에도 이원익은 영의정으로 임명됩니다. 이때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자, 인조에게 자신이 광해군 밑에서 영의정을 지냈으니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면 자신도 떠나야 한다는 말로 광해군의 목숨을 구하였습니다. 그는 직언을 두려워 하지 않고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진정한 충신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렇듯 그가 관료생활을 한 시기에는 당쟁, 임진왜란, 정묘호란, 광해군의 난정(亂政),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등 미증유의 외침과 국가적인 변란들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요직을 맡아 국난을 잘 극복하였고 사회를 안정시키는데 기여하였습니다. 때때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큰 풍파 없이 60여년의 관료생활을 훌륭하게 이어갔는데, 선조〜인조대의 치열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렇게 관료생활을 성공적으로 유지해 나간 사람은 드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항상 유능하고 철렴한 관료로 칭송을 받았고 정적들로부터도 심한 비난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는 그의 현명한 사리 판단과 고매한 인격 그리고 온건한 처신으로 누구에게나 인정을 받았고, 적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에게는 따르는 사람도 많았고 일을 추진하는데도 어려움이 적었죠.



관료로서의 이원익에게 가장 돋보이는 것은 엄격한 자기 관리였습니다. 그는 가난한 시절에 친구들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받기는 하였지만, 의롭지 않거나 부정한 재물이나 청탁에는 칼로 베듯이 단정하고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관료 생활에는 일체의 추문이 일어나지 않았어요. 이렇게 엄격한 공직 윤리의 확립이나 자기 관리는 지금도 칭송받아 마땅하다고 생각됩니다.



그가 죽은 뒤 장례 비용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인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승 40년에 그토록 가난했단 말인가?” 인조는 눈물을 글썽이며 관을 짤 나무와 장례비용을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후대에 조선 후기의 학자 남학명이 자신의 <회은집>에 이원익에 대해 언급한 부분도 인상적입니다. '류성룡은 속이려고 해도 가히 속일 수 가 없고, 이원익은 가히 속일 수 있으나 차마 속이지 못하겠다'.  오리 이원익, 재조명되어야 할 조선 중기의 명재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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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여말선초, 빛나는 청백리가 한 명 있습니다. 우리에게 시조 <강호사시가>로 잘 알려져 있는 고불 맹사성(1360∼1438년)입니다. 맹사성은 고려 우왕 때 문과에 을과로 장원 급제하여, 이후 세종 시기에 이르기까지 조정의 주요 관직(춘추관검열, 내사사인, 이조참의, 사헌부대사헌, 예조참판, 이조판서, 우의정)을 지냈습니다. 누구보다 어질고 청렴한 관리였던 맹사성. 그와 관련해 전해져 내려오는 일화들은 당대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세종시대를 꽃피운 청백리 명재상



 

 

 

맹사성 (1360∼1438), 고려 말 조선 초 문신 ⓒ한국문화정보원  

 

 

 

사람됨이 소탈한 맹사성은 항시 겸허하고 겸손하며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합니다. 검소한 관리이자, 효자로 정문이 세워질 정도였죠. 또한 시와 문장에 뛰어났고 음악에 조예가 있어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기기도 하였습니다. 그 마음이 너그러워 농민들에게도 말벗이 되어주는 인자한 사람이었습니다.

 

 

단, 조정의 중요한 정사를 논의할 때에는 과단성이 있었습니다. 그는 우의정 재임시에 태종실록(太宗實錄)≫ 편찬 감관사(監館事)였습니다. ≪태종실록≫의 편찬이 완료되자 세종이 이를 한번 보고자 하였는데 그때 맹사성이 말하길,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니, 사관(史官)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니 세종이 이에 따랐다고 합니다.

 

 

그는 1432년 좌의정에 오르고 1435년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나라에 중요한 정사(政事)가 있으면 반드시 그에게 자문을 구하였지요. 맹사성은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公服)을 갖추고 대문 밖에 나아가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에도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들어오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식량은 늘 녹미(祿米, 조정에서 봉급으로 주는 쌀)만으로 생활하다 보니 집이 가난했습니다. 소를 타는 정승으로도 유명했는데, 벼슬이 있을 당시에도 관료들이 타고 다니는 가마를 타지 않았다고 합니다. 소를 타고 대금을 불며 출근을 해 많은 사람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고 하네요. 그의 집 가까이에 살던 영의정 성석린은, 이러한 맹사성의 집을 오고 갈 때면 그 집앞에서 말을 내려 지나갔다고 합니다.

 

 

 

 

 

 맹사성 고택 ⓒ토함 명리학연구원

 

 

 

 

맹사성과 검은 소, 그 지극한 이야기



 

 

 

소를 타고 다니며 피리 부는 걸 좋아한 맹사성 ⓒfreepik

 

 

햇살이 따사로운 어느 해 봄날, 맹사성이 집 뒤 설화산 기슭을 오르던 중 어린 동자들에게 시달림을 받고 있는 큰 짐승을 발견했습니다. 장난기가 발동한 아이들이 짐승의 눈을 찌르고 배 위에 올라타면서 신나게 놀고 있던 것이죠. 짐승이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어쩐 일인지 꼼짝도 못하는 것을 보고는, 평소 남의 일에 참견 않는 맹사성이 호통을 쳤습니다.

 

 

"고얀 녀석들! 말 못하는 짐승을 돌보지는 않고 못살게 굴어서야 되겠느냐. 썩 물러가지 못할까."

 

 

혼비백산한 아이들이 줄달음 치고 난 다음 맹사성은 그 짐승에게로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짐승은 바로 검은 소였고, 탈진한 소에게 소죽을 쑤어다 먹이며 극진히 간호했습니다. 그러자 기운을 차린 소가 꼬리를 치며 맹사성을 따라 왔습니다. 집에 데려와 정성껏 소를 거두며 주인을 찾아주려 했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후 맹사성은 이 소를 수족처럼 아끼며 한평생 타고 다녔다고 합니다. 

 

 

후일 이 검은 소는 세종 20년(1438년) 79세의 나이로 맹사성이 죽자 사흘을 울부짖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맹사성과 검은 소의 일화에 감동하여, 맹사성의 묘 아래 소를 묻어주고 그 이름을 흑기총(黑麒塚)이라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이 흑기총은 경기도 광주 맹사성의 묘 앞에 잘 보존되고 있다고 하네요. 

 

 

 

 

 

흑기총과 맹사성 묘 ⓒdoopedia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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